국제웰빙전문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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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학문’이 아닌 ‘인문학’의 영역에서 다루는 이유?

  • 김용진 총장
  • 2026-01-11 18: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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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종 이런 질문을 받는다. “교수님! 행복도 학문이 될 수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묻는 사람의 질문에는 나름대로의 시대적 배경이 있다. 오늘날 긍정심리학자나 행복심리학자에 의해서 행복은 수치로 측정되고, 그래프로 분석되며, 통계와 지표로 관리된다. 행복지수, 삶의 만족도, 긍정 정서 비율 같은 개념이 그것들이다. 그들은 행복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고, 실험과 데이터로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사람들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행복 인문학 창시자로서 그들에게 묻고 싶다. 인간의 영혼을 수치로 그래프로 통계와 지표로 다룰 수 있는가라고 말이다. 마찬가지로 행복도 그러한 형이상학적 가치이다. 그리고 수치나 그래프로 분석하며 연구된 행복이, 과연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가를 되물어야 한다. 행복이 종이 위에 설명하는 ‘학문’이 되는 순간 우리는 한계의 수렁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학문을 하는 사람은 잘 알 듯이 학문이란 본질적으로 대상화하려고 한다. 그것을 분석하기 위해 분리하고, 설명하기 위해 단순화하는 작업을 한다. 이러한 방식은 물론 현상학적인 자연과 사물을 이해하는 데에는 탁월하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이나 행복을 다룰 때, 이 방식은 결정적인 한계를 갖는다. 

그러니 호모 사피엔스가 현미경이든 망원경이든 간에 어떤 측정 도구로써 행복을 학문으로 다루는 순간, 행복은 과학자의 실험실에 갇힌 연구 대상이 된다. 결국 피실험자인 사람은 수치로 환원되고, 삶은 변수로 나뉜다. 그래서 평균값과 상관관계를 알수는 있겠지만, 정작 한 사람의 고통과 갈등, 삶의 무게에는 다가가지 못하는 괴리에 직면하게 된다. 행복은 실험실 안에서 완성되지 않는 것이며 실험의 대상이 되기 곤란한 여지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행복은 논문으로 담아내기가 곤란한 영역이라고 말한다. 행복은 언제나 삶의 현장, 관계의 틈, 인간 내면의 질문 속에 존재하는 고차원적 영역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내가 행복을 ‘학문’이 아니라 ‘인문학’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하는 핵심 이유이다. 그래서 내가 창시한 행복 인문학에서는 행복을 학문으로 접근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학문과 인문학의 차이는 무엇인가? 학문은 인간을 연구 대상으로 본다. 그러나 인문학은 인간을 연구 대상이 아니라 생명 존재로 본다. 따라서 학문으로는 인간을 해부할수도 있지만, 인문학은 인간을 쪼개어 보지 않는다. 해부학이니 생리학이니 병리학 등과 같은 것은 의학이라는 학문의 영역에서 인간을 대상화하고 분석하는 것이다. 그런데 행복은 그런 방법으로 분석되지 않은 부분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행복은 분석보다 이해를, 설명보다 해석을,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여야 하기에 인문학의 시각으로 성찰하고 통찰해가는 지혜가 요구된다. 

이렇게 행복을 인문학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이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가”를 묻는 대신 “이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묻는 질문 방식의 전환을 의미한다. 이 방법은 내가 고안한 것이 아니다. 행복 인문학 방법론의 토대를 보여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먼저 시작했다. 소크라테스는 무지의 자각을 도구로 등장시켜 무제한의 의문을 가능케 했다. 플라톤은 참과 거짓, 참된 이데아와 거짓된 현상의 구별을 순수한 인식으로써 요청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성취의 결과가 아니라, 삶 전체의 방향과 덕의 실천으로 유다이모니아를 설명했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말했지만, 그것을 감각적 만족으로 축소하지 않았다. 그는 평정심, 즉 아타락시아를 통해 불안에서 벗어난 삶을 이야기했다. 이렇게 철학자들은 경솔하게 행복을 현미경이나 망원경과 같은 도구들로 측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로지 행복을 살아야 할 삶의 방식으로 사유했던 것이다. 

내가 행복 인문학의 창시자로서 2026년부터는 인성이 훌륭한 분들로 행복선언인을 발굴하고 참여시켜 연대하며 시민운동으로 펼쳐가는 것처럼, 행복 인문학의 발전을 다양하게 펼쳐가는 것은 새로운 이론을 만들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오래된 질문, 즉 호모 사피엔스의 순수 지성으로 돌아가기 위함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타인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무엇이 나를 불안하게 하고, 무엇이 나를 평온하게 하는가?” 뭐 이런 아주 중요한 질문들은 실험이나 통계로 답할 수 없는 것들이다. 즉 긍정심리학이나 행복심리학과 같은 것으로 분석하고 설명하려는 것이 정답이 되기보다는 오답의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행복 인문학은 이러한 근원적인 질문들을 끝까지 던지고 추적할 수 있는 장점이 분명 있다. 행복 인문학은 감히 유한적 존재인 인간이 행복을 실험 대상으로 올려놓고 분석하고 설명하려는 교만한 학문이 아니라, 아주 겸손하게 소크라테스가 그러했듯, 무지의 자각을 토대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지혜를 겸손하게 묻는 인문학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차이점을 당신은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학문은 가르칠 수 있지만, 인문학은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라 멘토로부터 모범을 보며 길러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학문은 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인문학은 머리에 암기하는 지식의 영역이 아니라 삶에서 체화되어야 한다. 행복도 마찬가지이다. 행복은 강의로 주입될 수 없고, 처방으로 완성되지 않는 가치이다. 

따라서 2025년 11월 29일, 대한민국 최초로 합법적인 자격을 가진 행복교수 15명이 국제웰빙전문가협회에 의해 탄생했다. 그리고 나는 이들 중 13명을 행복학교 교장으로 임명했다. 이들이 해야 할 일은 행복을 가르치는 일이 아니다. 행복학교를 통해 성찰과 관계, 삶의 태도를 길러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행복을 연구하는 전문가보다,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선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을 길러내야 한다고 생각했고 행복학교 교장을 임명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내가 행복교수나 행복학교 교장을 이 혼란의 시대를 율도국처럼 평화롭게 만들어 갈 홍길동의 분신들로 제시한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에는 배가 고파서 굶어죽는 사람은 많이 줄었으나 참된 지식을 얻지 못해 기갈을 당해 고독하고 은둔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급증하고 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행복이 이러니 저러니 하는 학자들의 논문이 아니다. 행복선언인들이 생명자본시대를 목표로 펼쳐나가는 ‘감사-존중-나눔’이라는 소박한 생명운동이다. 

생명운동이 필요한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과학적으로는 풍요롭지만 인문학적으로는 빈곤한 시대이고, 기술은 발전했지만 인간 관계는 엉망이 되고 있고, 지식 박사들은 즐비하지만 세상은 아수라장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럴수록 행복을 학문으로 다루려는 교만에 빠져서는 안되며, 인간을 이해하는 근본적인 인문학의 자리로 돌아서야만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행복은 통계에 의한 답으로가 아닌 인문학적 질문으로 계속되어야 한다. 행복은 인문학일때에 비로소 인간의 행복인생경영에 도움되는 방법들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행복에 대한 접근 방법을 인문학으로 붙잡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나 스스로를 행복 인문학 창시자라고 아낌없이 주장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글> 김용진 행복교수, 국제웰빙전문가협회 협회장, 행복 인문학 창시자, 행복 인문학 센터 총장, 행복 인문학회 학회장